[기타] 어딘가 쎄한 모나미 하제 동창이 올린 글 (521)




 

 

 



원래 어떤 일이 일어나는 날의 시작은 평범하다. 무난하게 흘러가던 하루를 문득 잡아 저 끝까지 내동댕이칠 수 있을 만한 일이 생기는 날엔 더더욱 그렇더라. 때로는 그런 아침이 오히려 아주 상쾌하게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 보자니 어쩌면 사람들이 말하는 신은, 좋은 기분이 땅으로 뚝 떨어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절망을 먹고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게 아니라면 뭐든 이제 괜찮아질 것 같던 와중에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되는 거니까. 그건 좀 너무한 거니까. 

 

 


핸드폰을 확인했다. 물론 아주 습관적인 일이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기계의 온도나 온통 울리는 알림 같은 건 조금 달랐다. 갑자기 쌓인 메시지,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매니저 형과의 메신저 창에 들어가니 제일 먼저 보이는 어떤 글의 링크. 그리고 천천히 활자를 읽어내리며 드는 생각은,


 

 


*




이럴 땐 과장해서 그러는 척해도 돼요.
재밌자고 하는 방송이니까.
시청자들도 다 이해하니까 편하게. 대본 없는 것처럼.
요즘 트렌드가 또 솔직한……


 

 



그 날은 문득문득 떠오른다. 후회와 창피함, 죄책감과 약간의 억울함이 마구 뒤섞인 묘한 감정도 같이 마음 꼭대기까지 차올랐다가 한숨 두어 번 크게 내쉬면 부푼 거품 터지듯 숨어 버리곤 했다.

 


누구는 꾹꾹 눌러 쓴 사과문을 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런데 하제야, 아니라고 해도 되는 거잖아. 그런 말 꺼내기까지 지속된 침묵 속에서 나는 쓴 숨만 몇 번이고 삼켰다. 너 이거 애드립 아니었다며. 대본이었다고 말하면 되는 걸 왜 네가 무지했다며 사과를 해.

 


입밖에 뱉었으면 그건 내 말인데. 내가 한 게 아닌 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 한 마디 뱉는 건 실은 힘겨웠다. 말하고도 눈치 살피며 바싹 마른 입술이나 축였던 것 같다. 그 누구 표정은 어땠더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또는 한심하다는 듯, 어쩌면 안타깝다는 듯, 그러나 결국은 상관없다는 듯 툭 건네는 말이, 그래. 네 선택이니까. 하제와 임명철은 멋대로 그걸 걱정이라 포장해 받아들인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을 돌려주길 택했다.

 


나 괜찮아. 진짜야.

 

 

 


*

 

 




너 괜찮아? 친구는 그렇게 물었다. 부은 볼을 타고 눈물 흘러내리는 와중에서 하는 말이라는 게 그랬다. 보고 있기만 해도 내가 다 아파서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난다. 누구보고 괜찮냐고 묻는 거야. 걔네는 진짜 나빴어. 뭐 그런 애들이 다 있어! 너 괜찮아? 아니지. 너 안 괜찮아. 지금 괜찮다고 말하면 안 돼.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이 네게 어떻게 닿을지 확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손을 뻗어 꼭 마주 잡았다.

 


내가 같이 있어 줄게.

 


그 말까지는 선명하다.

 

 



*


 

 


불 꺼진 방 안에서 눈을 뜬다. 물을 먹은 솜마냥 몸은 늘어진다.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얼굴에 따끈하게 열이 오른다. 시야에 명확하게 들어오는 게 없었다. 느린 호흡만을 내쉬는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한다.

 


늘 이 다음부터는 기억이 안 났다. 지우개로 벅벅 지워 버린 것마냥 부자연스럽게 흐리멍텅한 사실 몇 개뿐이 남아 있다. 웅크리던 몸 위로 날아드는 웃음이나,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마지막으로 학교에 갔을 때 한참 고개 숙이고 걷느라 오직 눈에 들어오던 건 제 신발코뿐이었던 아주 짤막하기만 한 것들. 

 


그리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교복을 입고 지내야 했던 몇 년이, 내게 잃어버린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나? 실은 도망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 스칠 즈음에는 무거운 팔 억지로 들어 다시 핸드폰을 켠다. 깜박이다 불이 들어오는 화면 위로 지칠 줄도 모르고 떠오르는 말, 말, 말들. 그리고 때맞춰 걸려 오는 전화. 망설이는 몇 초가 늘어지는 몇 년마냥 느껴지는 게 참 이상해. 여보세요, 흔한 인사말이 갈라진 목소리로 샌다. 하제야. 잠수를 타면 어떡해? 그리고 이어지는 여러 말들. 돌려줄 수 있는 답이 겨우, 죄송해요. 이런 거였다. 더듬더듬 지난 8년, 그보다 더 지난 3년을 되짚는 언어는 나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목소리부터 손끝까지 나를 이루는 건 전부 내가 아닌 것 같다. 전화기 너머에선 가벼운 한숨, 그래서 네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너는 오히려……, 그 후로는 모든 말이 웅웅대는 탓에 머리가 아프다. 

 

 




왜 진작에 자세히 얘기를 안 했어?
어쨌든 알겠어. 괜찮으니까 일단 집에 있어.


 


끊긴 전화에 손안의 기계가 이상하게 아주 차갑다. 주먹 쥔 손에서 힘이 빠지고, 손안에서 미끄러지는 것의 감각이 둔하다. 나의 고통은 나의 것이지. 누구든 알아줘야 하는 건 아닌 거지. 여기서 일어나야 하는 것도 나의 몫인 건 아는데……. 수많은 감정들이 머리를 쳐들었으나 뭉뚱그려 붙여 줄 이름이 없다. 

어차피 다 잊을 텐데. 그럼 모든 게 다 괜찮을 텐데. 그러나 이제껏 이 직업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너무 깨달은 탓이다. 그래, 사람들은 쉽게 잊지만 또 쉽게 잊지 않는다. 또 그들은 늘 내게 마음대로 굴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이런 일이 생기면 나오라고들 한다. 나와서 뭐라도 얘기를 해 보라고. 활자가 넘실대는 바다 위에서 존재의 의미나 가치 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참 이상하다. 아무래도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 여기에 괜찮다, 이런 말을 붙여도 정말 괜찮은 건가.


그만할 때가 됐나. 누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천장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따위나 바라보니 그런 생각이 스친다. 실은 이미 그만둘 때였는데 붙잡고 있던 거였을까.


아무도 곁에 없는데도 무언가에 꽉 붙들려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로 글 올라왔더라 확인하고 전화줘
괜찮아 옛날 일이잖아


글자가 부유한다.

 

 


*

 

 

 

 


[판&톡] 명철이한테 도움받았던 친구입니다 (모나미 하제 학폭루머 해명글)

 

 


[댓글 (53)]
SUGARUSH
가마니하길 잘했다...

930404
여기서도 관상이 어쩌고 했던 댓글들 많았음 표정이 쎄하다느니 원래 그런 사람 같았다느니ㅋㅋ.. 그런애들은 들어와서 이런 글 보지도 않겠지

내맘을턴시켜
꼭 이런 글엔 댓글 별로 없더라

눈 오는 은하의 우주
학폭+2차가해 사건인데 알바아니란애들은...ㅋㅋㅋㅋㅋ

MYMA
그니까 자퇴까지 한건 오히려 처음 글올린쪽이 계속 괴롭혀서 그랬단 소리지? 얜 잘못없는거고? 하이고 좀 불쌍하다 앞으로도.피해자꼬리표 달겠네
ㄴ 하제욕은참아도제욕은못참아요
   피해자한테 꼬리표라니 프레임 씌우지 마;
ㄴ MYMA
   내가 안좋은맘으로 쓴댓글도 아니고 안타깝다는건데 불쾌하게 들렸을수는 있겠는데 너도 말투가 둥글진않네 암튼 알겠어

공일단장
난 얘 팬도 아니고 뭣도아님 근데 씨발 피해자를 가해자로요ㅠ 진짜 힘들었겠다

미녀와괴수
쓰니야 제목에 루머 사실 아니고 오히려 반대입장이라는 거 추가해주면 더 좋을 것 같아!
ㄴ 도토리묵냠냠
   ㄱㅆ) 수정했다!


 

 

*

 

 

 


그런데,
뭐가 달라지지?

 

 

눈을 감았다. 오래 잠들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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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되게 희한한 사람이 있었다.


일단 좀 보면 정신이 없었다. 정신은 없는데 아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 좀 있어봐요, 하고 싶은 종류는 아니고 그냥 그 정신없음을 가만히 지켜보게 되는 그런 사람인 거다. 태양이 제가 떠오른 시간 동안 충실하게 사람을 푹푹 찌우는 여름날처럼, 여기 이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순간을 참 충성스러운 알바생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다만 태양빛처럼 이 하루에 잘 어울리지는 않고. 어딘가 붕 떠 있는 거였다. 그 점이 참 희한했다. 이상하지도 않고 희한했다. 


사실 정신없다 말고 표현할 다른 좋은 말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냥 내가 그리 어휘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가져다 붙이고 싶은 말이 분명 있기는 한데, 자꾸 가라앉으려 드는 티백처럼 잘 떠오르질 않았다. 에어컨 하나는 참 시원하게 잘 틀어주는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서 가만 턱을 괴고 물끄러미 그 사람을 보았다. 돈을 세고 있었다. 카페에 오래 엉덩이 붙이고 있으면 못 볼 장면은 아니다. 알바가 정산 하는 거. 다만 저게 벌써 몇 번째인가, 그런 거지.


궁금해지긴 했다. 캐릭터를 수집하는 인간으로서의 직업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직 직업이라 하기엔 지망생 수준에 불과해서 어디 드러내놓고 말하기도 창피하지만, 여튼 그랬다. 강박증 같은 거라도 있나. 아니면 정산 틀려서 크게 데인 적이 있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었지만 문제는 거기 있지 않았다. 뽑아낼 수 있는 이야기보다 사람 자체가 궁금해지는 데에 있었다. 저 사람 밥은 먹었나. 이거 끝나면 뭐 하는 걸까. 아니지, 마감까지 있던데. 근데 맨날 있는 건 아니잖아. 여기 없는 날엔 뭐 하는 거야.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 너무 근거 없는 호기심이라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물어보러 에너지를 쓰기에는 기운 빠지는 여름이었다.


어느 날은 그림을 그렸다. 평범한 얼굴이긴 한데 평범하진 않은 그 모습을 그렸다. 돈을 몇 번씩이나 다시 확인하고, 음료를 만들고, 사람이 없을 때면 괜히 어딘가를 닦고, 물소리, 무언가 갈리는 소리, 잠시 카운터 뒤에서 나와 테이블과 음료 반납대를 정리하는 손끝, 희미한 분위기, 웃음은 없었다. 이 역시 괴상한 일이라 말할 수 있는 게, 원래는 관찰의 가지가 여기까지 닿지 않는다. 진작 커다랗고 투박한 가위를 들고 듬성 듬성 가지를 쳐 냈어야 하는 궁금증이고 관찰의 시간이다. 꽤 유쾌하거나, 재미있고 독특한 요소가, 겉이든 속이든 잔뜩 있는 사람이었으면 몰라, 그 사람은 글쎄다. 그냥 거기 있었을 뿐이다. 일을 하면서. 좀 과하게 열심히 하면서.


또 어느 날은 슬쩍 이름표를 봤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 하나 맞으시죠, 맛 없는 목소리에 익숙해진 후였다. 카드를 내밀며 흘긋 살핀 유니폼은 애매한 각도로 가려져 있어 훔쳐보기 어려웠다. 현, 현... 눈을 억지로 가늘게 떠 가며 어깨를 조금 옹송그렸나, 어떤 시선이 머리 끝에 느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들었더니, 아, 눈 마주쳤다. 영수증 버려 드릴까요. 그리 묻는 말이 툭 떨어졌다. 물음표 없이 참, 그 사람다웠는데, 언제부터 그 사람다운 걸 내 안에서 정의 내렸던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날은 비가 왔다. 카페는 똑같이 시시한 모양이었지만 비를 피하는 손님들을 위한 우산꽂이를 하나 만들어 놓았다. 물기만 없지 잔뜩 축축한 비 내음을 털어내며 우산을 꽂아 넣다가 문득 그 사람을 봤다. 어서 오세요, 목소리는 아아까 작은 파동이 되어 머리칼을 훅 스치고 지나갔는데, 말을 한 사람이 과연 맞는가 싶게 시선은 다른 데에 가 있었다. 창 밖은 어느새 어둑하고, 토독 토독 맺혀, 모여서 흘러가는 빗방울의 연주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마음에 들었다기에는 그 사람 눈꼬리가 희한하게 처져 있었다. 희멀건한 뺨이 느리게 올라오는 손에 가려졌다. 마른 세수를 하고는 그 사람이 한숨이나 쉬었다. 얼굴 반쪽을 가리는 곧은 손가락 틈새로 뭘 읽었던가.


그리고 그날 밤도 더웠다. 덥기만 한 게 아니라 습해서 불쾌지수도 높았다. 침대에 누워 선풍기를 켜 놓고, 윙윙대는 모기를 한 손으로 대충 쳐 내며 곰곰 생각에 빠졌다. 빠졌다기보다 그 흐름에 말려 들어갔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사람 생각에 휘말린 게 오랜만이라, 불쾌지수인지 다른 뭐인지 마음에 안 들게 피어올랐다.



하여간 참 희한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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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여름은 멀쩡한 사람도 늘어지게 만드는 계절이란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좋으냐 싫으냐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르자면, 물론 너 같은 애들이 따갑게 물어올 때나 억지로 대강 하는 말인 척 내놓는 대답이지만, 아무래도 좋은 쪽이지 않을까. 우습게도 넌 얇은 내 가짜를 믿는 건지 그냥 물어보는 말에도 왜 그리 짜증이냐며 팔이나 툭 치곤 했다. 별 의미 없는 투닥임과 익숙한 토라짐이 눈가를 살금 간질이는 햇살보다 편하다.

여행 가고 싶다, 가벼운 목소리가 나를 건드렸다. 편하지 않은 건 오히려 이럴 때다. 점심 시간을 죽이며 운동장 구석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함께 하는 시간의 이유를 문득 다시 생각하게 될 때. 작은 말에도 괜히 내밀어야 하는 답을 고민하게 될 때. 여행 가면 좋지, 결국 그렇게 무난한 말을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흘려 보냈으면서도, 이루어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이에의 거짓말 같은 미래를 제멋대로 상상하게 될 때. 여행 누구랑 갈라고. 필요 없는 말을 굳이 굳이 덧붙인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려 인상을 찌푸릴 때. 그럴 때 내뱉고 싶은 말은 죄다 노랫말에 쓰기에도 너무 진하고 따가워서, 가슴 저 끝까지 따끔거린다. 어디 보낼 데 없이 끌어안고 있는 게 가끔 벅차다. 그래서 숨이 턱 턱 막힐 때면 옆에 있는 널 본다. 그러면 더더욱 목덜미 어딘가가 따끔거려, 괜히 신경질이나 내며 덥다며 제대로 된 문장도 아닌 투덜거림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몰라. 윤환 너랑 갈까?"


더워 죽겠네, 땀 봐, 그런 중얼거림이 뚝 멎었다. 느리게 시선을 돌려 다시 너를 봤다. 넌 뭐 그런 말을 하냐. 튀어나오는 대답에 네가 무안한 듯 눈을 가늘게 뜬다. 나 역시 머쓱해져 정면만 본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애들이 흐릿흐릿 흔들린다. 초록빛 나뭇잎 틈새로 햇살 조각과 함께, 농담이잖아 바보야, 그런 목소리. 미안해지긴 했는데 나 좀 이해해 줘. 그런 마음이다. 진짜 몰라서 그러냐고.


"이거나 먹어."


주머니에서 바스락대는 소리를 꺼냈다. 뭐야, 제대로 묻기도 전에 주먹만 슥 내민 걸 네가 받아간다. 연한 빨간 색의 딸기맛 사탕이 또 다시 바스락 소리를 낸다. 좀 녹았을 걸. 괜히 말하며 흘끔댄 시야에 네가 입 안으로 사탕을 던져 넣는 게 걸린다. 다행이다.


"여행 가. 까짓 거. 하와이 뭐 그런 데로 가."


돈은 니가 벌어. 입 안에서 어느새 녹아 달라붙었을 게 뻔한 사탕을 떼내느라 네가 대답을 타이밍 맞춰 하지 못할 새에 말을 쏟았다. 별 말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하얀 뺨이 이상하게 붉은 여름날, 약간의 침묵 후에 넌 하는 말이라는 게,


"더위 먹었어?"


얼굴 빨개. 어쩔 수 없이 웃어 버렸다. 너무 쉽게 사랑에 빠져 버릴 나이야. 그래서 그래. 열아홉이잖아. 쉬운 사랑이라 생각지는 않지만 당장 네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떠오르는 게 그 정도다. 그마저도 건네진 못하고, 뭔 생각하는데? 그런 장난인 척 허세 부리는 말 뿐. 내 멋대로 하는 상상이 부끄러워 머리를 넘겼더니 땀에 절었다며 손부채질이나 해 준다. 네가 눈치가 없는 건지 내가 용기가 없는 건지.


내가 솔직해지면 어떻게 돼?


바람이 분다. 쌓이고 쌓였던 더위가 한 꺼풀 벗겨지는 듯한 이런 순간에는 또 장면을 함께하는 너와 내가 제법 어울리는 것 같다. 분위기 타고 착각 하고, 다 뜯어 고쳐야 하는 버릇인데 말이다. 열아홉의 마음이 자꾸 자꾸 커져만 가는데. 감성이 돋는 밤 아닌 때도, 땀을 뚝뚝 흘리면서 별로 시원하지도 않은 네 부채질에 좋다고 웃는 게, 내 이성으로 더 눌러 놓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러니까, 말 안 해도 알아주면 안돼?


뭐든 말해달라고 하고 싶은 여름날이 지나간다. 왜 웃냐고! 물어도 대답 못 하는 이유와 함께다.




-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여름의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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